around라는 아카이브(archive)

-6월 20일, 생각다방에 불쑥 나타나 전시에서 쉬다간 호영 씀

1.

2014년 여름 생각극장 산책다방에서 열린

히요-현정씨의 전시 <around>의 일부인 영상에서,

작가의 것으로 짐작되는 발 한 쌍은 끊임없이 걷습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휘적휘적 걷기도 하고,

까만 신발을 신고 콘크리트 위로 성큼성큼 나아가기도 합니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는 발이 한 쌍만 있을 때도 있고,

여럿의 타박타박이 담겨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프레임에 계속 나타나는 한 쌍의 발은

수많은 시공간을 지나며, 그곳에 담기며,

걸어다닙니다 (walk around).

2.

아카이브(archive)라는 단어를 ‘기록보관소’라는 한자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굳이 이 단어를 쓰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제가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아카이브라서, 또

제가 읽은 멋들어지는 글들에서 그렇게 쓰길래, 라고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 앓이 (Archive Fever)> (1996)* 라는 글에서 자크 데리다는

아카이브란 어떠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미국의 한 흑인 퀴어 블로거 마크4마크(marc4marc)는

기록의 보관/아카이빙이란 언제나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구별’의 행위는 우리가 서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사를 만들 때 그것의 솔기가 보이지 않도록, 그것이 최종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과정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대화를 할 줄 모르고,

더 나아가 과정을 되짚어가 다른 길을 찾으려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around>를 아카이브라 부를 때,

저는 그것이 이미 지나간, 닫혀있는 단상들의 모음이 아니고,

서사가 아니지만 수많은 서사의 그림자들과 꽃봉오리들을 간직한 공간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사진 4

 3.

아카이브에 비해서 서사란

그것의 관중/독자라는 ‘보는 대상’에 대해 꽤나 신경을 많이 써 세상에 나온 창작물입니다.

서사의 대표적인 형태 중 하나인 ‘신문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에 대한 정보를 재깍재깍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가 <around>에 들어서서 읽고, 매만지고, 귀기울여 본 것은 주로

‘뭔지 모르겠는 것’들 이었습니다.

지도, 가방, 장신구. 비행기표와 기차표.

누군가가 그려준 초상화. 누군가를 그린 수채화.

잡지에서 오린 그림. 영화 찌라시. 등등, 그것들과 마주할 수는 있었지만

왜 이 비행기표가 이 비행기표 옆에 있는지,

이 버스 안에서 히요-현정씨가 했던 생각은 무엇인지,

왜 이 반짓고리 안에는 털실이 한 웅큼 들어 있는지,

가방에 달린 인형은 누구에게 언제 받았으며

왜 새 가방에 달리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습니다.

사진 3

4.

아카이브란 물론 종류가 여러가지라, <around>에 비해

보다’ 관람객’의 손을 살포시 붙잡고 스텝을 밟아 주는 것들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락의 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책자 (리스트 형식으로 이뤄진,

그마저도 조각들의 집합인) 외에는 부연설명이 없었던 이 전시는,

스스로에 대해 가치 증명의 시도나 사과 없이 존재하고 있음으로서

저를 ‘위한’ 것이 아님에도 저에게도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시를 ‘좋아했는지’ 또는 전시가 저에게 ‘편안했는지’와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저에게 전시가 편안했는가 물으신다면,

그날 다락에서 제가 하도 바스락거리고

바닥 면적을 많이 차지하는 바람에 낮잠에 방해를 받은

폴과 봄이 과연 그래 보였다고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5사진 1

5.

이 글을 시작하며 거짓말을 하나 했기에 자백과 함께 마무리를 하는 척 해 보겠습니다.

사실 <around>의 영상부분에서 등장하는 현정-히요씨의 발들은,

내내 걸어다니지만은 않습니다.

몇 초 간, 발가락을 모래알 사이에 묻은 채 그들은 파도를 맞습니다.

이 영상에서 처음으로 현정씨의 발들은 사라집니다.

파도는 발이 보이지 않는 길고도 짧은 순간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발은 다시 모래밭에 조금 더 깊숙히 발목을 디딘 채,

나타납니다. 그들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still around).

그리고 다시 걷습니다.

* ‘아카이브 앓이’는 제멋대로 번역한 제목입니다. 마크4마크를 인용한 부분도 제가 설렁설렁 번역한 것인데, 원문은 이 포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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