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을 시작했다

복싱일기1

6시 반, 7시. 아침 알람은 두 번 울린다. 복싱 수업은 7시 반에 시작이고 집에서 적어도 7시 10분에 나와야 수업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으니 6시 반에 일어나는 게 좋지만, 아직 한번도 그렇게 해보지 못했다. 7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나 이를 닦고 대충 운동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5분 정도 늦게 복싱장에 도착해서 줄넘기를 하고 있으면 은희씨가, 아니면 현아씨가, 아니면 은희씨와 현아씨가 허겁지겁 들어와서 뒤쪽에 자리를 잡고 줄넘기를 하기 시작한다.

복싱을 시작하게 된 건 은희씨와 현아씨가 자기방어 캠프를 다녀오고 난 후였다. 두 사람 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반짝 하던 시기에 은희씨를 만났고 은희씨의 친구가 근처에서 복싱 코치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운동을 하고 싶다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운동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해야 순발력이 생긴다더라”는 은희씨의 말과, 마침 까페에 들어온 현아씨의 맞장구에 우리는 그날 당장 복싱 수업 3개월치를 등록했다. 사실 그날 내가 먼저 계좌이체로 등록을 완료하고 두 사람은 핸드폰 배터리가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지불을 미뤘는데, 혹시 두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서 나홀로 복싱하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단톡방을 만들어 두 사람을 독촉했고 다행히 우리는 그날부터 동료가 되었다.

 

[너의 리듬]

이제 운동을 다닌지 3주가 지났다. 하루의 첫 수업인 7시 반 수업에서 초보는 우리 셋 뿐이라, 우리는 거울 한켠을 차지하고 나란히 서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첫날 배운 건 제자리에서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이었는데, 은희씨와 나는 함께 시작했다가도 점점 리듬이 틀어졌다. 나는 조금 빠르고 은희씨는 조금 느리고. 여기에 현아씨까지 합세하면 셋 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속도가 다르다.

복싱일기2

[그래도 미세하게 간격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내가 마음속으로 ‘지옥에서 온 준비운동’이라 부르고 있는 유산소 운동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이날은 현아씨와 내가 준비운동 시간에 맞춰 와서 같이 했다. 나중에 현아씨에게 “준비운동 빡쎘죠?” 하니까 현아씨는 “아~ 저는 그냥 제 페이스대로 했어요” 라고 대답했다. 어쩐지 안색이 평온하더라.

나는 앞서가는 사람 쫓아가고 잘하려고 용쓰느라 토할 거 같았다.

은희씨는 이 날 준비운동 다 끝나서 도착했다.

수업은 총 50분인데, 은희씨는 20분 넘어 도착할 때도 있다. “그냥 아침에 샤워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나온다고 한다. 대단하다.

현아씨는 수업 시작 후 10분 이내에 등장하지 않으면 그날은 안 오는 것이다.

 

[춤]

복싱 스텝이랄까 하는 것을 처음 배운 날에는, 다 함께 시작했는데 현아씨가 점점 스텝을 춤처럼 밟고 있는 것이었다. 보폭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뒤로 가야 하는데, 발 사이 간격을 점점 줄이더니 투스텝을 밟았다. 나는 현아씨에게 발을 그렇게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충고했지만 현아씨는 계속 춤을 췄다. 그 옆에 선 은희씨도 어쩐지 점점 그런 스텝으로 변하고 있었다.

복싱일기3

나중에 코치님이 오시더니 보폭 유지를 하라고 주의를 주셨다. 그리고 점점 빠르게 카운트를 세며 스텝을 해보라고 하시는데, 현아씨가 제일 잘 따라가는 거다. 점점 리듬이 빨라지는데도 계속 스텝이 나왔다. 코치님은 현아씨가 1등이라며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다. 나도 그냥 처음부터 춤으로 할걸.

 

[머리, 어깨, 무릎, 발]

내가 복싱을 시작했다고 했더니 한 친구는 ‘너의 그 곤충같은 팔은 괜찮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해주었다. 초기에는 사실 팔보다 발바닥이 아팠는데 이제 슬슬 주먹을 뻗는 동작을 하다보니 어깨나 팔이 아프다. 뿌듯하다.

복싱일기4

[잽을 처음 배웠던 날, 우리는 ’주먹 뻗기 40번’ 한 세트를 끝내고 동시에 어깨를 부여잡았다.]

 

수업 내용은, 따로 설명하기가 멋쩍을 정도로 간단한 동작들의 반복이다. 제자리 뛰기, 가드 올리고 제자리 뛰기, 앞뒤로 살짝 점프하며 뛰기, 앞으로 한 발 나갈 때 잽 하기, 앞으로 나갈 때 잽 하고 뒤로 발 옮길 때 숙이기, 이런 것들을 왼발 또는 오른발이 앞으로 가게 자세를 바꿔가며 40번씩 4세트를 하면 된다. 그런데 셋 또는 둘이서 시-작 하고 뛰다가 리듬 안 맞아서 다시 시작하고, 20번쯤 했는데 어깨나 종아리나 무릎이 아파서 잠깐 쉬고, 몇 번 했는지 기억이 안 나고, 쉬는 시간에 서로에게 고통을 호소하거나 안부를 듣다 보면 40번 4세트를 다 할 리가 없다.

수업은 주 5일이라서 일주일에 거진 서너번은 만나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쩜 이렇게 만날 때마다 반가운지. 아침에 줄넘기를 하다가 은희씨나 현아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면 나는 안도한다. 저번주에는 두 사람 다 안 나타난 날이 있었는데 거울 속에 나 혼자 들어가 있으니 40번 4세트를 진짜로 달성할 것처럼 하게 되고 너무 괴로웠다.

 

[낮잠]

오늘도 복싱을 다녀와서 낮잠을 잤다. 초기에는 일찍 일어난 김에 더욱 부지런한 하루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무거운 눈꺼풀을 거부했지만 몇일을 출근 지하철에서 기절해서 자고 일터에서 졸게 된 뒤로 그냥 잠이 오면 그것을 받아들인다. 복싱 갔다가, 집에서 뭔가 먹고, 조금 사부작거리다가 점심쯤에 낮잠을 자는 나홀로 시에스타 생활. 방금도 이 글을 쓰다가 30분 자고 온다는게 2시간 자버렸다. 선선한 바람에 얇은 이불 덮고 한낮에 잠드는 것. 복싱 덕분에 시간 벌어 이렇게 잘 쓰고 있다.

 

[300엔의 사랑]

사실 내가 복싱을 하고 싶었던 건 <100엔의 사랑>이라는 영화 때문이다.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데 하루종일 게임만 하다가 밤중에 잠옷바람으로 100엔 샵에 과자를 사러 가는, 별볼일 없는 여주인공이 복싱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 막바지에 주인공은 줄넘기를 쌩쌩이로 500번쯤은 연속으로 할 수 있고 화려한 스텝으로 100엔 샵의 복도를 가로지르는, 여전히 별볼일 없는데 그래도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운다. 복싱이란 나에게 바닥에 비지땀을 뿌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단련의 스포츠였고, 이 영화에서도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 주인공의 몸과 눈빛에서 나타나는 게 좋았다.

나는 이 영화를 작년에 영화관에서 현아씨와 봤고, 은희씨는 집에서 봤다고 한다. 아까 은희씨와 복싱장을 나오면서 우리는 <300엔의 사랑>이라면서 웃었는데, 언젠가 셋이서 다시 <100엔의 사랑>을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 영화를 본 다음날, 우리는 아마 영화 때문에 흥분해서 너무 늦게 잠들었다며 수업에 지각을 할 거다.

 

복싱일기5

쓴 사람: 호영

복싱 3인방에서 출석 체크를 담당하고 있다. 내가 때리는 걸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고, 잘 때렸을 때의 느낌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다.

쓴 날: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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